사소한 정의와 라드츠 3부작

사소한 정의 (2016) | 사소한 칼 (2017) | 사소한 자비 (2018)   (엔 레키 작 | 신해경 역 | 아작)라드츠3부작

로그라인. 라드츠 제국의 인공지능 함선 ‘저스티스 토렌‘호. 자신이 사랑하는 오온 대위를 잃고 자신마저 산산히 부서진 함선은, 보조체라는 파편된 몸뚱이 하나로, 3천 년을 군림해온 절대군주 아난더 미아나이를 향한 복수를 여정을 시작한다.

1.

예전에 이언 M. 뱅크스의 컬쳐 시리즈에 등장하는 ‘마인드’라는 인공지능이 인상적이었는데. 이 작품 역시 인공지능에 대한 다른, 인상적인 상상력을 보여줍니다. 최근에 AI의 발전과 ‘특이점’ 이후에 관한 담론(AI가 인간을 지배할 거라는 등의)들을 본 적이 있는데, 이 소설은 그것의 현실적인(?) 가능성을 흥미진진하게 그려내고 있어요.

또한 이 소설은 서술 방식이 흥미로워요. 기본적으로 1인칭 시점이지만 그 안에서 3인칭(?)의 시점을 오갑니다. 또는 그렇게 묘사하죠. 이를테면,

주인공 브렉은 인공지능 함선의 보조체예요. 시체 병사라고 불리는, 인간(포로)의 몸이지만 개체성은 지워지고 함선의 일부분으로만 작동하고 행동하는 존재지요. 브렉은 자신의 눈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동시에 다른 보조체의 눈으로 보고 말하고 행동해요. 그러면서 모선인 함선과 통신하죠. 개체로서의 주장이나 의견은 눌러놓고 기계적으로 움직이면서… 그 과정을 한 문단 안에서 동시에, 다중적으로 보여줘요. 그렇게 1인칭이지만 3인칭처럼 이야기를 진행시켜요.

그러한 서술 방식이 처음에는 꽤 낯설게 느껴지는데. 주인공의 정체를 알게 되고 그에게 감정이입하게 되면서부터는, 동시에 여러 시선으로 보고 듣고 행동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무척 재미있어져요. 브렉은 철저하게 인공지능적으로(?) 네트 신경망처럼 정보를 습득하며 판단해 움직이고, 그것이 그의 정체성인 거예요.

그것이 이 소설들을 읽는 재미의 포인트 중 하나예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인공지능의 모험은 덤일지도 몰라요. 물론 그 모험 자체도 충분히 흥미진진하지만요.

2.

SF 팬으로서 그리고 대개 SF 글을 쓰는 제게는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작품이었어요. 하지만 일반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힐지는 모르겠네요. 그래서 궁금하기도 해요. 위에서 말한 서술방식이 진입장벽이 될지 아닐지.

그러나 SF를 쓰시는 분들에겐 적극 추천합니다. 이 작품은 SF의 ‘최신의 흐름’을 볼 수 있는 작품이에요. 이런 작품들을 바탕으로, 또는 그 영향으로, 앞으로 보다 진일보한 작품들이 나오겠지요? 그러기를 바래요.

덧.

이 ‘라르츠 3부작’이 화제가 된 것은 소설 속 인칭대명사들이 모두 여성형이라는 거였죠. 때문에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성별을 알 수 없어요. 독자들 각자가 짐작만 할 뿐이죠. 저 역시 주인공 브렉이 ‘남성처럼’ 말하고 행동한다고만 (선입견으로) 느낄 뿐이고. 그 외의 인물들은, 절대군주조차 성별 구분이 어렵더군요.

그것은 여성 작가이기에 가능한 멋진 시도이고, 이 작품의 인상을 ‘강렬하게 하는’ 데에도 성공한 듯해요.

그런데 어떤 이들은(또는 어떤 기사나 평들은) 이 작품을 페미니즘 소설로 여기는 듯하더군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건 아니다, 입니다. 이 SF 소설은 ‘남성들 중심의 현실에서 여성의 지위를 쟁취하기 위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작가가 페미니스트 일 수는 있어요. 충분히 그럴 것 같고요. 데뷔작인 이 작품을 출판사에서 ‘인칭대명사를 바꾸자’라고 제안했을 때, 작가는 “책을 안 냈으면 안 냈지 그렇게는 안 하겠다.”며 거절했다지요?

하지만 작가가 인물들을 여성형으로 그린 것은 ‘통념‘을 깨기 위한 것이지 ‘전복‘을 위한 것은 아니에요. SF를 일종의 사고 실험으로 봤을 때, 저는 멋진 SF를 쓰는 작가들의 인식이 거기에 머문다고는 상상할 수 없어요. 그들의 상상력과 통찰은 그보다 더 큰 것들을 지향하죠. 이 소설의 작가 앤 레키도 그럴 것이라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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