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만의 복수 레시피

<프라미싱 영 우먼Promising young woman> (2021)

반 년여 작업을 끝내고 미뤄두었던 영화나 책을 보는 중이에요. 간만에 극장에서 <프로미싱 영 우먼>을 봤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재미있고 인상적이어서 소개해 봅니다.

스릴러에 여성영화로 분류할 수 있는 영화인데, 로그라인은 이래요. ‘7년 전 죽은 친구 니나를 위한, 캐시의 네 가지 복수 레시피

영화는 중간에 루즈한 부분이 없진 않지만, 그래도 매끈하고 스타일리시하게 흘러가요. 캐시 역의 배우(캐리 멀리건)의 연기도 훌륭하고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 돋보이는 건 시나리오예요.

최근 여성 영화들이 대두하며 자의식 넘치고 강한 여성이 나오는 영화들이 유행인데, 이 영화는 그들 중에서도 으뜸인 것 같아요. (물론 제가 본 것중에서 말이죠) 가장 용감한(?) 시나리오인 것 같아요.

찾아보니 에메랄드 페넬이라는 감독의 데뷔작이고,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썼더군요. 그래서인지 (감독보다는 작가로서 더) 패기가 느껴져요. 이 데뷔작만 보면, 에메랄드 페넬은 앞으로 눈여겨 보아야 할 작가이자 감독인 것 같아요.

시나리오.

영화는 ‘복수극’의 외형을 갖고 있어요. 수많은 복수 스릴러들이 피해자의 아픔을 설정하고 가해자를 찾아 복수하며 쾌감을 주는 방식인데… 이 영화는 그 이상을 보여줘요. 그리고 ‘그 이상’의 힘은 전적으로 시나리오에서 나오는 거예요.

영화는 초반에 친구의 죽음을 간직하며 사는 캐시의 고통을 보여주는데, 뭇 남성들을 향한 그녀의 복수들은(남자들을 유혹해 그들의 위선을 까발리는) 자학적이기까지 해요. 이후 친구 죽음의 책임자들에게 복수하는 방식은 윤리의식이나 도덕심의 경계를 위험하게 넘나들어요. 우여곡절 끝에 책임의 ‘당사자’를 찾아가 최후의 복수를 실행하지만… 그녀의 마지막은 복수의 쾌감 보단 아련함 같은 걸 느끼게 하죠.

이어지는 에필로그는, 이 영화가 단순한 복수극에 머물지 않고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하는(또는 겨냥한) 감독의 의도를 드러내요. 그때쯤 되니 영화가 단순 스릴러 장르물 이상의 ‘작품’임을 깨닫게 되더군요. 또 거기서 끝났다면 ‘여성 감독이 만든 여성 영화’로 마무리되었을 텐데, 헐리우드 영화답게 장르적 반전까지 선사해요. 

그러고 보면 매우 영리한 시나리오예요. 작가가 하고픈 말을 ‘제대로’ 다 하고, 영화적이고 장르적인 쾌감까지 선사하니까요.

작가의 시선 또는 태도.

이 영화는 여성 감독이 만든 페미니즘 영화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을 말하고 있어요. 제가 느끼기엔, 우리 주변의 위선을 까발리는 영화예요.

처음에는 남성 위주 사회에서 남성에게 당한 ‘여성 피해자 입장’에서 이야기를 펼치는 것 같지만, 그 남성 위주 사회에 동조하는(또는 빌붙어 사는) 여성의 위선을 드러내기도 해요. 또 과거 사건에 협력했다가 죄책감으로 살고 있는 남성을 용서하기도 하죠… 이 시나리오는 남성을 무작정 악으로만 그리는 게 아니라 그 이면의 구조적인 문제를 건드리고 있는 거예요. 

그러한 부조리의 본질을 꿰뚫고 직시하는 작가의 시선과 태도가 마음에 들어요. 용기 있어 보이고요.

또 다른 위선, 남성성의 본질.

제가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높게 사고 싶은 건, 이걸 쓴 여성 작가가 남자들의 본질을 너무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영화에는 꽤 많은 남자들이 등장하는데(영화를 보신 여성분들은 이해 못할 수도 있고, 남성분들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일 텐데), 그 남자들이 보여주는 행태가 대단히 현실적이에요. 적어도 ‘술 취한 여자를 어떻게 해보려는’ 남성들 대개는 이 영화 속 남자들과 같은 행태를 보이죠. 무조건 폭력적이라기 보단 약자의 본성을 드러내는 거예요. ‘내 남자친구는 다를 거야’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도 다르지 않아요.

남성인 제가 뜨끔한 걸 보면, 이 시나리오를 쓴 여성 작가는 남성들의 위선적인 본질을 제대로 건드리고 있어요. 여타 영화의 클리셰를 뛰어넘어서 말이죠.

그래서, 재미있냐고요? 

보시는 분에 따라 호불호는 다를 수 있겠지만, 저는 추천입니다. 시각적인 쾌감을 주는 복수극과 다른 노선을 취하며 이야기를 끌고 가지만, 주인공의 심리 변화와 영화 전반의 기저에 깔린 뉘앙스는 보다 복잡하고 폭력적이에요. 그만큼 더 생각할 꺼리를 주는 영화이기도 하고요. 즐감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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